정기룡 장군 조선의 최연소 소드마스터, 우와 (5722) 세상, 이렇고 저렇게

정기룡 장군 조선의 최연소 소드마스터, 우와

정기룡
(鄭起龍, 1562년~1622년)은 조선 시대의 장군이다. 자는 매헌이다.

정기룡 장군 
[편집] 생애
정기룡_장군.jpg
원래는 1586년에 무과에 합격하고 신립의 아래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이 터지자 별장이 된다. 거창 싸움에서 왜군을 이기고 금산 전투에서 조경을 구출한 뒤 곤양의 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또한 상주성을 얻는데 성공하고 계속하여 여러 공을 세우게 되어 '바다의 이순신과 육지의 정기룡' 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또한 제2차 조일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정유재란 때에 고령에서 적 장수를 생포하고 병마절도사가 된고 성주, 합천, 초계, 의령 등 여러 성을 탈환하는데에 성공한다. 

광해군 때에는 3도 수군통제사와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오른다. 경북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에 그의 묘가 있으며 경북 기념물 제13호이다. 

또한 현재 금남면 중평리 상촌 마을에 사당인 경충사가 있고 중평리 당산골 진양 정씨 사당 아래쪽 100m지점이 정기룡 장군의 생가가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밭이 되어 있고 생가 뒤쪽에 있던 대밭이 약간 남아 있다.

상주 경천대 용소에 바로 정기룡장군의 용마에 얽힌 전설이 있습니다.

http://kid.knowledge.kr/kid/TraditionalCulture/tc03_02_01_v01.jsp?tbId=1&num=14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 때 60여차례에 걸친 왜군과의 전투에서 한번의 패전도 없이 모두 승리했으며 
조금도 부상을 입은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龍馬)의 힘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경천대 위에 있는 바위인데 왼쪽 네모진 것이 용마의 말구유통이고 오른쪽 동그란것이 정기룡장군의 세수통이랍니다. 
 

1794년에 편찬된 홍량호(洪良浩)의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 수록된「정기룡전」에 
 나타난 그의 용마에 관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정기룡은  담력과  용력이  뛰어나고  두  눈이  횃불처럼  빛났다.  그가  적지에 

뛰어들어  적을  무찌를  적에는 마치  평지를  달리는  것  같았으며,  왜적이 총들을 
한쪽으로  모아  일제히  쏘아도  그를  명중시키지를  못했다.  그는  전투를  벌이다
가 목이 마르면 왜적의 배를 가르고 그 간을 씹었다.  용기가 북받쳐 오를 적에는  그가  탄  신마(神馬)가  여섯  길이나  되는  참호를  능히  뛰어  넘고,  가파른  절벽이나 위험한 언덕길도 매나 소리개처럼 날아올랐다.”

“정기룡은  일찍이  기병  8명과 함께  거창 객사에  머물러  있었다. 
밤중에 왜적
이  대량으로 들이닥쳐  정기룡 일행을  포위하였다.  그  때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으나  정기룡만은  가만히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았
다.  날이 밝은 뒤에 기병들을 이끌고서 말을 몰아 담장을 뛰어 넘어 적의 포위
를 돌파하였다.”


『동야휘집(東野彙集)』에  실린  설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정기룡은  곤양  사람으로  자는  경운이고  초명이  무수로  무과에  급제했다.  어

려서부터  탁월하여  전쟁놀이를  할  적에도  아이들이  다  두려워하였다.  일찍이 
집안이  가난하여  생활하기  어려워  편모를  모시고  진주로  가서  소금장수로  생
활하다가  병영의  노안에  예속되었다.  하루는  낮잠을  자다가  소리를  질렀는데, 
병사가  듣고서  이상히  여겨  이유를  묻자,  정기룡은  장부로  태어나  큰  뜻을  펴
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소리가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병사가  정기룡의  인물됨을  짐작하고  속량시켜  주었다.  

그  때  진주  이방의  혼사일로  정기룡이 전주  이방 권모의  집으로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전주  이방은  집안이  무척  부유하였으나  아들은  없고  시집갈  나이의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선견지명과  지인지감이  있어  자기의  일생이  좌우되는 배필은  스스로  선택하겠다고  하며  부모가  선택해주는  혼처를  거부하였다. 

하루는  친척집에 일이  있어 부모가  출타한  사이에  정기룡이  심부름을  왔는데,  문틈으로  내다보니  비록  의복은  남루하나  대장부의 기상이  있어,  권모의  딸이  자신의  배필감을 만난  것을 기뻐하면서  안채로  인도하여  대접하였다.  조금  후에  부모가  돌아와  외간  남자를  내당으로  들인  딸의  행위를  질책하자,  딸이  자기의배필로  선택한  자라고  소개하며  중매를  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권모의  부부가딸을  질책하고  딸의  요구대로  정기룡을  만나보니  기상이  남달라  정기룡에게 청혼하였다.  권모가  서면으로  모친에게  알리고  혼인하자고  하는  것을,  정기룡은  그럴  수  없다고  하며  직접  가서  모친에게  알리고  하겠다고  하자  권모가  칭찬하며  자기의  말을  타고  다녀오라고  하였다.  

이에  정기룡이  자신은  걷는  데  익숙해  있다고  하며  걸어가겠다고  하자  권모가  말의  내력을  설명해  주며  말을 타고  가게  하였다.  그  말은  어느  상인이  끌고  다니던  말이었는데,  딸이  보고서 부친에게  훗날  소용될  곳이  있을  것이라고  하며  사달라고  졸라서  권모가  사놓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은  워낙 사나워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서  멀리서 먹이만 주며 기른 것이었다.  정기룡이 이 말을 듣고서 가까이 가자 말이 갑자기  온순해졌으므로  모두들  정기룡이  말의  임자라고  하면서  정기룡의  능력에 감탄하였다.  정기룡이 그  말을  타고  진주를 다녀와  혼인한  다음에  권모가  정기룡의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편모를  모시고  와서  처가에서  같이  살자고  하였으나,  권모의 딸은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재산을 나누어 주면 진주로 가서 살겠다고  하였다. 

이에  권모가  재산을  진주로  보내  주자,  정기룡의  부인이  철물
(鐵物)을  많이  사서  모으며  훗날  소용될  곳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기룡의  부인은  그  동안  사  모은  쇠로  병장기를  만어  말과  함께  정기룡에게  주며  거병하게  하였다.  정기룡이  전장으로  나가면서  노모를  근심하자  부인은  이미  노모를  모시고  피난할  곳을  마련해  두었다고 하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정기룡은  전장으로  나가서  여러  차례에 걸쳐 승리하여 벼슬이 높아져 병사에 이르렀다.”

 출처-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pdf파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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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엔 충위공 정기룡(1562∼1622) 장군이 있었다.

22전 22승의 이순신과 60전 60승의 정기룡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처참했던 전쟁 임진왜란(1592∼1598)을 승리로 이끈 쌍끌이 장군이었다. 

이순신은 바다에서 적선을 보이는 족족 깨부셔 왜군의 보급로를 완전 차단했고, 정기룡은 뭍에서 까부숴 조선을 거쳐 명나라를 치려던 왜군을 독 안에 든 쥐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7년간의 임진왜란을 승리로 마무리한 이듬해 추진된 전쟁 공신 명단에서 성웅 이순신과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둔 권율은 물론 패장 원균까지 '선무 1등 공신'에 추품됐으나, 정작 가장 화려한 전공을 세운 정기룡 장군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정기룡 장군님이 사용하던 칼


경북 상주를 중심으로 60전 60승을 거둔 육군의 정기룡 장군은 1599년 공신도감에서 처음 추품한 전쟁 영웅 26명 명단에는 당당히 이름이 올랐으나, 공신도감이 최종적으로 내놓은 9단계 109명의 명단에는 빠져 있다.

1605년, 선조는 도승지 신흠을 내세워 정기룡 장군을 슬그머니 선무 1등 공신에 추품한다는 교지를 발표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7년 만이다. 정기룡이 순국한 지 151년이 흐른 1773년엔 영조가 '충위공'이라는 시호까지 내렸다.

                                  경북 상주 정기룡 장군의 묘소. 

무슨 사연이 있기에 선조는 뒤늦게야 정기룡을 이순신·원균·권율과 같은 반열인 선무 1등 공신으로 추품했을까.

우리나라 역사 인물에 천착하는 작가 박상하씨가 두 권으로 펴낸 '나를 성웅이라 부르라'(일송북)는 비록 소설 형식을 띠고 있긴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갓 서른한 살의 초급장교가 경상도 일대 육지에서 60전 60승이라는 불패의 전력으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조선을 구한 정기룡 장군의 전기나 다름없다.

"역사는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어야 한다. 기필코 '술이부작(述而不作·기록하되 지어내서 쓰지 않는다)'이어야 한다. 옳은 이야기다. 장편소설 '나를 성웅이라 부르라'를 쓰면서도 가장 애쓴 부분이 그 대목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이 작품의 단초가 되었던 '매헌실기(梅軒實記)'를 위시해 역사적으로 철저한 고증을 얻기 위해 수많은 자료를 수집했다. 정기룡에 대해 80여 군데나 거론한 '조선왕조실록'은 종이가 닳도록 뒤졌다. 그런 다음 역사 현장을 수십차례 답사하며 정기룡의 일대기를 하나하나 복기했다.

책은 크게 세 대목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1권은 영웅의 기상을 점칠 수 있는 그가 태어나 25세에 과거 무과에 급제하고, 활쏘기에 출중하다 하여 선조로부터 '정기룡(鄭起龍)'이라는 이름을 제명 받는 청년 시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2권에선 그 후, 임진왜란을 맞아 힘겨운 7년 전쟁을 치러내는 시절, 60전 60승이라는 빛나는 전적을 올렸으나 전쟁이 끝나고 정치적 배제에 따라 일등 공신에서 제외된 사연이 가슴 아프게 서술됐다. 마지막엔 이순신 장군의 뒤를 이어 수군통제사로 임명돼 61세에 경남 통영에서 운명할 때까지를 시종 속도감 있는 문장으로 관통한다.

저자는 "정기룡 장군이 초기에 전쟁 공신에서 배제된 것은, 이미 사망한 이순신과 원균, 환갑이 넘은 권율에게만 선무 1등 공신에 추품한 것만 봐도 안다"며 "37살의 젊은 살아있는 전쟁 영웅이 선조는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해석하며 여운을 남겼다.


일송북출판사는 내년 1월 중으로 서울과 대구·상주·부산 등지에서 '정기룡 장군' 관련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그에 대한 학술적 조명을 계획하고 있다.


◆정기룡 장군의 전장지

한성→거창(우지)→거창→김천→진주→상주(용화동)→상주(화령)→상주 목성→영천→문경(당교)→상주(대승산)→상주(북장사)→예천→고령(용담천)→성주→고령→합천→합천(초계)→의령→영동→보은→합천→함양(안음)→거창→경주→도산성→김천→거창→거창(가조)→함양(사근역)→합천(삼가)→거창→합천(초계)→합천(삼가)→무주→진주→사천→단성→창원→진해→고성→하동(곤양)→영산→합천→성주→합천(야로)→합천(삼가)→사천→성주→현풍→합천(초계)→고령→거창(지례)→진주→영성→하동(곤양)→사천→사천 왜성

출처: 
http://cafe.daum.net/IMSILHOPE/YtiO/86?docid=1IOuL|YtiO|86|20091008185253&q=%C1%A4%B1%E2%B7%E6%C0%E5%B1%BA&srchid=CCB1IOuL|YtiO|86|20091008185253&re=1


경상남도 진주시에 전해오는 정기룡(鄭起龍, 1562~1622) 장군 설화.

정성박, 류종목이 1980년 8월 30일에 진주 상봉동동(上鳳東洞) 비봉루에서 채록하였으며,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편찬한 『한국구비문학대계』 8-3에 수록되었다. 제보자는 박무세(당시 73세)이다.


[내용]

정기룡이 과거 보러 갔을 때, 임금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임금의 꿈에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 임금이 신하를 불러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 정가(鄭哥)라는 사람이 막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로 인해 이름을 정기룡으로 고쳤다.

정기룡 장군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아도 실제로는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에 버금갈 만큼 큰 무공을 세운 거룩한 장군이었다. 정기룡 장군이 출세한 데는 지리학, 즉 풍수의 영향이 컸다. 어느 중이 상좌를 데리고 마을을 지나면서 “(명당자리를) 보았느냐?”라고 물었다. 보리밭에서 밭을 매고 있던 노인이 중을 잡고 명당자리를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썼다. 그 명당자리에 정기룡 장군의 할아버지가 묻혔다.

출처: 
http://jinju.grandculture.net/gc/contents/contents.jsp?tid=40001864


정기룡장군님  사당 및 유물은  하동의 경충사 와  상주의 충의사 로 가시면 볼수 있습니다. 



출처 :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62&articleId=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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