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7,867
글:2251 | 서비스:1020 | 메인:0 | 2013.03.16 01:51:41 (*.96.159.156)
(추천수: 2)
1212사태 주범이 누군데요?? 전두환 아닙니까?? 그리고 최초 사망자가 군인?? 5월 18일 전대앞 학생시위를 무력진압하여 사상자를 낸건 계엄군 공수부대였습니다. 그걸 계기로 학생에 시민들이 합세하여 시작된 겁니다. 글고 총기약탈 전차 탈취해서 군부에서 죽은 사람은 10명도 채 되지않고 확인된 것은 전차에 2명이 죽었고 8명이 총기사망 나머지는 아군을 적군으로 오인하여 사격해서 죽은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리고 북괴의 선동?? 북괴가 미쳤다고 광주에서 운동을 벌입니까?? 20만명을 선동하려면 적어도 백명 이상의 북괴가 필요하다는 건데 100명이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거쳐서 전라도까지 간답니까? 간첩이 조오련도 아니고 북한에서부터 수영해서 뭐 여수까지 간답디까?? 그럴꺼면 부산을 점령하고 운동을 일으키는게 맞죠. 계엄령은 전국에 내려졌는데 왜 민주화운동은 광주에서만 났을까요?? 잘생각해보세요. 북괴의 선동이었으면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도 운동이 일어나야 마땅한 것입니다. 광주만 유독 폭력진압을 심하게 해서 그런거고요. 운동이 아니라 항쟁이나 이정도로 해야 하는건 맞는데요, 폭동이라뇨. LA흑인폭동은 미국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괄시와 억압에서 비롯되어 흑인들이 먼저 일어나서 일으킨 거고요. 518은 경우가 다릅니다. 그리고 518을 반페이지만 채우는 교과서가 있다면 그학교 나온거를 부끄럽게 생각해야죠. 반페이지 나온게 뭔 자랑이라고 글을 싸질러요.
2013.03.16 23:26:00 (*.86.43.177)
(추천수: 1)
반페이지요? 장난합니까? 중3 2학기 사회교과서 그것도 교육부에서 정해주는 책으로 배우는거 고 전국공통이구만 누어서 침밷습니까? 5.18시위자 학생 한명죽은거요? 그거 원인 불명입니다 누가 죽여서 죽은건지 자연사한건지 때마침 죽은건지 그냥 유언비어일뿐입니다 그리고 박정희 죽고나서 전국에 계엄령떨어지면 가만히 있어야 정상아닌가요? 그당시에 김대중 필두로 더 심하게 나간겁니다만? 그리고 그당시에 간첩은 흔하디 흔했고 간첩이 지형가려서옵니까? 혹시 미필인지 ㅡㅡ 그리고 이미 부산지역에서 부마항쟁같은 폭동을 일으키긴했다만 그다음이 광주폭동이고 그리고 광주폭동이지 그게 운동입니까? 자기들이 법어기면서 까지 대항했으면 죄값을물어야지 총기들고 날리치는게 말이되냐고요 그러고 보면 la도 la흑인운동이지 폭동입니까?
2013.03.15 13:02:11 (*.86.43.177)
(추천수: 1)
그리고 그당시에 광주 살았던 시민얘기에는 수많은 증언이있죠 시민군 일부가 총들고 와서 시위에 참여해라 아니면 쏴죽인다 하고말이죠 시민군 대다수가 칼빈.m1 이런거 들고있었고 계엄군은 당시에 m16들고있었습니다 그런데 5.18 사망자 시신해부에는 칼빈,m1 소총탄이 나왔다는겁니다 계엄군에의해 죽었다기보단 시민군에 저항한 시민 사망자가 많다는걸 볼수있습니다 거기다 납북 배우 최은희씨가 78~81년까지 3년동안 북한에 납치됬습니다 자기를 왜 잡아두냐고 빨리 남한에 보내달라 요청을했지만 거기있는 고위관계자는 조금만 기달려달라 곧 조국통일이 될태니 하고 말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년도를 보면 80년도에 광주사태가 터지죠 그걸두고 얘기한겁니다 또 북한 선동 노래중에 광주의 학도야 어서보자? 비슷한 내용문구가 보입니다 여기서 광주 학 도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말하겠죠? 또 북한쪽에는 5.18 기리는 기념비가 존재합니다 이 전황을 보고 5.18에대해서 재조명해야된다고 목소리가 나오는거죠 기성세대들 한태물어보면 광주는 폭동이다 아니다에 반반의견이 있죠 그 반에 전라도 출신 이런쪽이겠습니다
2013.03.15 14:28:21 (*.201.128.170)
법원판결로 전두환이 광주 사상자 발생에 책임이 있고 12-12가 군사반란임이 밝혀져 있습니다.
12.12,5.18 주요쟁점의 재판부 판단 1996-08-26 17:34 12.12 및 5.18사건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주요쟁점들에 대해 대법원 판례 및 법률조항을 근거로 상세한 판단이유를 제시했다. ▲ 내란목적살인의 관여여부 재판부는 전두환 피고인이 광주 시위진압과 관련, 정도영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을 국방부회의에 참석토록 해 군수뇌부로 하여금 자위권발동을 결정케했다는 점을 중시, 명백한 내란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판단했다.재판부는 또 전 피고인이 비상기구를 설치한 뒤 국헌문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위를 조기에 강경진압하고자 계엄군을 증파투입하고 조기 시위진압 명분으로 광주시민에 대해 살해행위를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승화 육참총장 연행의 정당성 재판부는 일단 정 총장 연행이 적법한 요건을 갖춘 정당한 행위였는지 여부를 살핀 뒤 "전두환 피고인등은 연행에 앞서 사전에 구속영장을 발부받거나 사전영장 없이 긴급구속키 위해서는 군검찰관의 사전지휘나 사후승인을 받아야하고 또 구속후 48시간이내에 영장을 발부받아야한다"며 군법회의법을 근거로 삼아 鄭총장 연행의 불법성을 못박았다. 재판부는 특히 "전 피고인이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정 총장을 10.26사건 연루혐의를 조사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연행한 점에 비춰 목적이나 동기가 부당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밖에 "정 총장 수사를 통해 얻는 이익과 계엄사령관을 연행함으로써 초래될 계엄업무의 공백이나 국군통수권의 위협등의 불이익을 서로 비교하면 결코 앞의 이익이 크다고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 최규하 전 대통령의 사후재가 재판부는 최 전 대통령의 사후재가가 전두환 피고인측의 불법행위 발생이후에 이뤄진 승락으로서 전 피고인의 불법행위를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전 피고인측이 정 총장 연행후 육본측 병력에 정식적으로 대항하는 등 불법행위를 한 이후에 최 전 대통령이 사후승락한 것인 만큼 그같은 승락에 의해 피고인들의 불법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2013.03.15 14:30:34 (*.201.128.170)
<검찰이 밝힌 광주시위와 진압 전말>
1995-07-18 22:50 [계엄확대 이전 상황] 5월14일 오후 2시50분께 전남대생 2천5백여명이 경찰저지선을 뚫고 시내로 진출, 전남도청 앞에서 3시간여동안 처음으로 대규모 가두 정치집회를 열었다. 5월15일 새벽 7공수여단은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각 1개 대대씩 출동시켰으며 대학생 1만5천여명은 교내시위를 마친 뒤 오후부터 전남도청앞에서 연합 가두시위를 벌였다. [계엄확대와 계엄군 배치] 5월17일 10시40분 2군사령부는 광주소재 8개 전문대에 31사단 병력을 투입토록 지시하고 오후4시에는 7공수여단 33.35대대를 31사단에서 작전통제토록 지시했으며 오후 7시40분 전교사에 18일 0시부로 충정작전이 유효하므로 대학점령은 18일 새벽 4시, 불순분자 체포는 18일 0시이전까지 완료하라고 지시하고 오후 8시께 2군사령부 통제아래 전남대 조선대 등의 소요주모자를 전원체포하라고 시달했다.계엄사 진압부대 투입명령에 따라 7공수여단은 18일 오전1시께 31대대를 전남대에,35대대를 조선대에 각 배치했으며 31사단 소속 장교 14명과 사병1천1백32명도 전남도내 16개 대학등에 배치됐다.이날 오전 3시께 2군사령부의 무기고 안전대책 강구지시에 따라 전교사는 광주시내 직장예비군이 보유하던 무기 4천7백17정과 탄약 1백16만발을 회수했고 31사단의 무기고 접근자 발포승인 건의에 대해 지휘관 재량하에 실시토록 지시했다.오전 10시30분 전남대생 1천여명이 금남로에 집결, `계엄해제'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해 화염병 투척으로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과 충돌했다.시위대의 투석으로 흥분한 공수부대원들은 인근 점포나 골목안까지 추격해 시위대를 체포했고 이 과정에서 시위대와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했다.5월19일 오전 9시30분 尹흥정 전교사령관은 1개 공수여단의 증원을 요청했다.시위대는 금남로 사거리.충장로 1가 등에서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격렬한 저항을 했고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충장로 일대 다방 및 여관, 민가를 수색하고 검거한 시위대를 진압봉으로 가격하거나 군화발로 차고 옷을 벗겨 연행했다.「이날 시위로김안부(36)가 사망」했고 군경 24명과 학생 시민 수십명이 부상했다.5월20일 오전 7시 3공수 여단이 추가로 광주에 도착했다.오후 8시30분 시위대 5백여명은광주상황이 뉴스시간에 보도되지 않자 방송국 건물에 화염병을 던졌고 9시까지 화염에 휩싸였다. 밤 12시께 상황이 위급하다고 느낀 지역대장과 중대장들이 실탄지급을 요청했고 11공수여단 61대대장등은 62대대장 지프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중대장들에게 분배하고 대대장 명령에 따라 발포할 것을 지시했다.이날밤 「광주역 일대 시위진압 과정에서 김재화(25)등 4명이 총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6명이 부상했다.교도소 주변 양민학살 확인1995.12.29서울지검 12.12및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는 광주교도소에서 5.18 당시 교도소 주변의 교전상황 및 양민학살사건,교도소내 시민살해 암매장의혹등을 중심으로 이틀째 현장조사를 벌였다.검찰은 이날 조사를 통해 3공수여단이 광주상황을 알리기 위해 시외곽으로 빠져나가려는 시민군을 향해 무차별 발포하면서 일어난 것으로 잠정결론을 내렸다.김상희 주임검사는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간 국도와 순천행 고속도로 사이에 위치, 당시 시외곽으로 빠져나가려던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다수의 교전이 발생했다"며 "이 과정에서 시위와 무관한 시민들이 도로를 지나다 매복병사들로부터 무차별 난사를 받은 몇가지 피해사례가 확인됐다."고 밝혔다.이에 따라 교도소를 습격하는 시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발포했다는 계엄사 발표는 상당부분 설득력을 잃게 됐다.<5.18 '충정명령'은 무차별진압 작전>2007-07-24 15:42과거사위는 작전명 '충정'에 의해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 가운데 작년 12월 기준으로 현역 복무하고 있는 7공수 부대원 9명 중 8명을 집단면담, 과격진압 사례가 있었다는 증언을 청취했다.5월18일 희생된 김경철씨는 공수부대에 의한 대표적인 과격진압 사례였다.청각장애로 인해 말까지 할 수 없었던 김씨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당시 광주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모씨와 작전참모 백모씨는 "공수부대원이 연행자의 귀 뒷부분을 칼로 찌르는 장면을 목격하고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공수부대원이 대들었다"며 "술 냄새가 났다"고 증언했다.과거사위는 이 증언이 사실인지를 조사한 결과, 같은 날 광주국군통합병원에 실려온 '전재서'라는 사망자의 사인이 우측 귀 뒷부분의 자상과 총상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공수부대원들은 진압 때 대검사용을 부인했지만, '전교사 작전상황일지'(5.18)에는 '7공수대 총검진압'이라고 적혀있고 안기부에서 1985년 작성한 자료에도 '7공수여단 착검진압'이 명시되어 있다고 과거사위는 전했다.3공수여단의 '전투상보'에는 광주역에서 "가스탄, 화염방사기, M203(유탄발사기), E-8(연막탄) 발사통 등으로 시위대를 제지했다"고 기록돼 있다.전남도청앞 집단발포, 상부명령 받아 실행2005-05-18 10:0180년 5월 21일 당시 전남도청앞 시위군중에 대한 집단 발포명령은 당시 특전사의 지휘계통을 통해 내려왔다는 증언이 나왔다.이같은 내용은 MBC가 17일 밤 방영한 특집 다큐멘터리 '80년 5월 두개의 반란'에서 김기석 당시 전투교육사령부 부사령관(소장) 등 당시 현지 지휘관들의 증언 등을 통해 제기됐다.이는 국회 청문회와 검찰 조사에서 신군부가 주장한 '우발적 자위권 발동차원'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다.또 17일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광주 도착 이후 계엄군의 실질적 지휘와 통제가 특전사로 넘어갔다는 점도 다시한번 확인됐다.당시 계엄 상황에서 광주의 지휘 계통은 전투교육사령부가 맡도록 돼 있으나 신군부에 의해 무력화 됐음을 반증하는 것이다.발포명령과 관련, 당시 김 부사령관은 "그 당시에 그 사령관(정호용 특전사령관)은 진압을 위해서 내려 온 사람이다"며 "이 과정에서 '사격을 하라'는 그런 지시는 실제 작전 부대장한테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백남이 당시 전교사 작전참모도 "정호용 장군이 와서 전교사에 별도로 사무실을 차렸다"며 "윤흥정(전교사 사령관) 장군하고 협력한다 하면서 자기네들끼리 지휘 통제했다"고 증언했다.MBC는 이 프로그램에서 5월 당시 시민을 향한 발포는 공수부대-특전사 사령관-육군참모차장-실질적 실세(?)로 이어지는 지휘라인에서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했다.특히 황영시 육군참모차장이 강경진압을 위해 `무장 헬기와 전차 등을 동원하라'는 지시도 한 것으로 확인됐다.이는 이구호 당시 기갑학교 교장이 96년 검찰조사에서 증언했던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김 부사령관은 "당시 광주사태에 대한 실질적 지시는 계엄사령관보다 황영시가 더 관심있게 지휘를 했었다"며 "심지어는 `무장헬기.전차 뒀다 어디다 쓰느냐'하는 얘기까지 했다"고 증언했다.
2013.03.15 20:00:59 (*.225.202.40)
(추천수: 1)
정말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어이가 없네요 진짜 짜증이 날려고 하는데 울 막내 삼촌은 광주 사태때 돌아가셨습니다. 왜 ? 군인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답니다 그럼 울 삼촌의 조카인 나는 빨갱이요? 그럼 우리 가족 자체가 다 빨갱이요? 그리고 그 광주 민주화 운동이 왜 시민들이 총을 탈취하고 그런 이유를 아시요? 뭐 북한의 짓 개소리하지말라고 넌 니 가족이 군인의 총에 맞아 뒤졌는데 그딴 개소리 할수 있을것같아? 니네 아버지가 군인의 총에 맞아서 죽었어 넌 어찌 할거야 그 시대가 또 독재정신시대고 그 지시를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했다고 하면 넌 어찌 할건데 진짜 보고 있으니깐 너 대가리 내가 총 싸 죽이고 싶네요 알거면 제대로 할거 말할거면 제대로 조사 하고 말하라고 시발 이런글 보면서 피 눈물 흘리는 사람들 많으니깐 개 쉐끼들아
2013.03.16 19:15:08 (*.127.66.227)
멍청한 일베충들이보이네. 달리 일베충이겠냐. 3.1운동은 비폭력을 주창했지만 완전한 비폭력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제암리에서는 흥분한 군중들이 일본군순사를 쳐죽이기도 했지. 물론 결과적으로는 일방적으로 조선인이 학살을 당했지만. 당시 왜구는 3.1운동을 조선인 폭도들의 순사학살과 일본인 학살의 만행이라고 규정하고 연일 왜구신문에 같은 주장을 실어 날랐다. 3.1운동마저 없었으면 대한민국의 독립정신은 종니 초라해져. 그래서 왜구들은 그걸 무너트리고 부정하고 싶어하지. 당시 조선의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고 싶거든. 그래서 아직도 3.1운동은 폭도들의 난동이며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저 왜구들의 주장을 그대로 차용해서 대입한 곳이 바로 5.18 전두환이 그대로 왜구들의 주장을 차용하기에는 문제가 발생해. 3.1운동 당시의 항거 객체가 주권없는 피식민지인이었던 것 과는 달리 5.18은 항거 객체가 주권을 가진 국민 자체였거든. 집주인이 총들었다고 경비원이 집주인을 학살할 명분이 없는거야. 그래서 대한민국에 주권이 없는 제3의 세력을 대입하여 탄압명분을 만들게되지. 그게 바로 북한. 당시 기자로 광주에 있던 조갑제(현재 대표적 수구꼴통) 조차도 당시 광주 시민들은 '김일성은 오판말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동구호를 외치며 행진할 정도로 공산당과 엮이는 것을 싫어했다고 진술했다. 일베충과 그 동조세력들은 그냥 접시물에 코박고 죽어라. 공기도 아깝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개새끼. 됐냐?
2013.03.17 15:41:20 (*.97.127.29)
본문 부터 댓글 까지 읽어 내려 오다 보니 일베 분이시든 아니시든 어찌되었든 알아보려고 노력한 흔적들은 보이네요.... 그런데 역사를 배우고자, 알고자 하는 제대로 된 자세가 안되어 있으시네요....먼저 교과서와 같은 정규과정에서 배우는 지식은 그래도 지속적인 검증을 거쳤다는 말입니다.그러니 신빙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반인들은 본인이 보고자 하는 것, 듣고자 하는데로 보고 판단을 해버립니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수많은 역사학자들과 관계자들은 그에 따른 많은 연구를 통해서 신빙성을 가리고 미래의 아이들을 위한 지침을 만들죠. 물론 교과서 라고 해서 다 옳다는 말은 아닙니다. 현재 한국의 사학계는 일제 강점기 당시 일제사학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에 그 분파가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때문에 한국의 고대사 라던지 심지어 근 현대사까지도 많은 왜곡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고조선이전의 역사는 단군할아버지라는 신화로 묻어버렸죠. 그래서 현재 많은 유수의 대학에서 연구진을 중국과 일본으로 파견해서 진실을 파헤치려고 노력 하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궁금한 점이 있다면 다른 여러 매체를 통해서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좋은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되고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적으로 맞다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특히 인터넷과 같은 정보의 여과가 없고 신빙성이 없는 내용은 무조건적으로 믿어서는 더더욱 안된다는 겁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교과서와 정규교육과정부터 제대로 배우고 스스로가 비판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소양을 갖춘 다음에 제대로된 정보를 습득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 하자는 겁니다. 그리고 끝으로 저는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이라고 정의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어디서 어떤 정보를 듣고 거론하더라도 12.12사태는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반역죄이며국민을 위해 존재해야하는 군대가 국민에게 총을 겨눈 것 자체가 잘 못 이라는 겁니다.이미 그 자체가 군대가 국민의 군대가 아니라는 걸 반증하는 겁니다.
2013.03.18 17:14:35 (*.226.244.129)
광주폭동은 해외에서도 내란으로 규정하고 있죠 시선을 바꿔서 보면 광주폭동진압은 확실히 그렇게 할수밖에 없었음 총들고 다른 국민들에게 위협까지 될정도로 위험하게 시위를 하는데 중기관총에 수류탄까지 들고있는 시위대를 그럼 경찰로 막습니까? 바로 몇백키로 위에 적국이 나라를 노리고있는 상황에서 후방에서 폭력불법시위(이것도 많이 순화한겁니다)가 일어났는데 그걸 당연히 막아야지 안막습니까?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고 생각되는사람들은 공부 다시하고 오시기 바랍니다 ps.광주시민만이 국민은 아닙니다 지금상황과 비교해보면 민주당이 민심이 어떻다느니 국민이 어떻다느니 외치는거랑 비슷한 맥락이죠 민주당 지지자만 국민이고 광주시민만 국민인지 참.. 광주사태가 그곳사람들을 제외한 다른국민들을 위험에 빠뜨렸다는건 생각 못하나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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