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그림자 (1851) 나의 상상

 체스트 제국은 두번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지도를 무려 다섯번이나 수정해야 했던 제국력 350년경 정복기의 빌 체스트 6세현자 릭 반덴 허크 시절은 암흑기에 가까웠던 대륙에 길과 군대를 전파하였고, 제국력 470년경 두번째라 일컫는 현자 혹은 도망자 타이 레놀의 시절은 기술적인 업적을 높게 쌓아올린 시절이었다. 현자 타이 레놀의 야반도주는 학자 및 기술자의 봉기를 가져왔는데, 사실상 자국내 필요한 인재가 없어지자 당시의 국왕인 체스트 12세는 그가 결정했던 탄압을 결국 5년만에 철회하였지만 이미 체스트 제국의 기반이 되는 기술력은 그 지지대를 잃은지 오래였다. 당시 타이 레놀 탄압에 가장 적극적이였던 레오나르드 판치 후작은  그 5년간 가장 영향력이 센 귀족이었는데 체스트 12세의 여동생을 아내로 삼아 국왕의 처남이 되었고 판치의 여동생은 체스트의 다섯번째 후궁으로 들어가 사실상 제국의 두번째라면 서러울 존재였다.



 학문탄압이 끝난후엔 판치 후작의 영광도 사그러드리라 예상됬지만 오히려 국왕은 그를 모르텐 비어스가 떠나 공석이 된 대장군의 자리를 내주어 권력과 군대를 동시에 쥐게 하였다. 더이상 궁엔 판치의 적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느껴질 만큼 모든 귀족들이 그에게 잘보이려고 노력하였고 가끔은 국왕이 두번째일 정도로 그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엄청났다. 



 젊은 시절의 판치는 미술에 큰 재능을 보여 체스트 12세의 아버지에게 등용된 화가였다. 특히 초상화부분에서는 누구도 따라올수 없으리라 여겨질만큼 궁 대부분의 귀족들에게 그림을 그려주며 하루가 다르게 명성을 얻었으나 한낮 기술자에 불과한 아무개가 그린 그림을 보고 체스트 12세는 그를 자신의 전속화가로 임명하였다. 체스트 11세가 운명을 달리하고 12세의 시대가 도래하자 젊은 판치는 더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기술자였던 타이 레놀은 화가로 시작하여 건축, 예술, 무기등에서 뛰어남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체스트 궁의 재건축이 하이라이트였는데 무려 6년에 걸쳐 벽화와 천장화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리는 열정을 쏟아냈고 그 뛰어난 미술적 감각과 새로운 건축법등을 보고 판치조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후 타이 레놀은 제국 최고의 칭호인 현자라고 불렸고 그는 더이상 관직에 머무르지 않고 국왕의 조언자가 되어있었다. 결국 화가가 필요하여 판치가 재등용되었으나 꿩 대신 닭이라는 걸 모를리 없는 판치는 당시에 알고지내던 귀족무리를 모아 타이 레놀의 헛소문을 퍼트렸고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어 학문탄압이 되었던 것이다. 귀족도 아닌 타이 레놀에게 현자(릭 반덴 허크는 건국가문중 하나인 허크가문출신)도 모잘라 조언자라는 새로운 자리까지 내주어 2인자를 공표하였으니 이를 못마땅히 여긴 궁내 귀족들은 그 소문의 진위보단 단지 그의 능력을 시기하여 좋든 싫든 판치 후작의 공모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 당시 체스트 12세는 일찍이 자신의 여동생을 아버지가 귀히 여기던 판치 후작에게 보내었는데 학문탄압 이전 여동생으로부터 타이 레놀의 관한 전모를 듣게되었다. 대부분은 거짓이고 판치 후작과 그의 일당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것은 국왕으로서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처리하고 빠르게 종결시킬수 있었지만 체스트 역시 타이 레놀의 존재 자체가 조금씩 부담스러웠다. 결국 없던 자리도 만들어 그에게 2인자라는 자리를 주었지만 임명식에도 타이 레놀은 평상시와 같이 무표정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정확히 타이 레놀은 감투따위에 관심이 전혀 없었기에 그런거였지만 국왕의 입장으로는 현자와 조언자라는 최고자리조차 좋아하지 않는다면 생각을 달리해야했다. 



 결국 몇달이 지나지않아 학문탄압은 시작되었지만 그에게 받았던 도움을 잊지않는 국왕은 마지막 살길을 내주었고 타이 레놀은 그 살길을 쫓아 지금의 렌 왕국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이후 5년간은 판치 후작과 그의 일당들이 그 세를 과시하는 시기라고 불러도 될 만큼 안하무인이였지만 국왕은 오히려 그들에게 그럴 수록 조금씩 더 높은 자리를 주어 그 명성을 더 높게 쌓도록 하였다. 



 결정적으로 판치 후작이 대장군의 지위에 오르자 딴마음을 먹게 되었다. 왕궁수비대는 200여명 남짓이나 대장군인 그가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무려 3천에 가까웠다. 거기에 그에 동조하는 귀족들의 사병까지 합친다면 그 숫자는 왕궁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장군에 즉위한지 몇일 지나지않아 판치 후작은 자신의 집으로 몇몇 귀족들을 초대하였고 이와같은 자신의 계획을 조심스럽게 허나 확실하게 건내자 이미 그의 수하나 다름없던 귀족들은 모두 종이에 서명을 하며 동참하였다. 



 학문탄압의 철회로 궁내외적으로 안정된 기류가 흘렀고 수확기에 이르러 예년보다 풍년이 확실시 되자 체스트 12세는 그것을 기념하여 북부로 사냥을 나가는 계획을 짜게된다. 하늘에 둘도 없는 기회를 얻게된 판치 후작은 즉시 계획실행을 앞당겼고 그의 일당들은 사병을 포함하여 4백여명에 이르는 군사들을 집안에 대기시켰다. 하지만 사냥당일에 이르러 국왕은 갑작스런 복통으로 사냥을 가지 못하였고 판치 후작은 씁쓸한 미소만 남기며 궁을 떠날 채비를 하였다. 아까운 마음과 함께 되돌아 와 본 것은 불에 타오르는 집과 붙들려 나온 그의 가족들이었다. 그리고 복통이 있어 침대를 떠나지 못했다던 체스트 12세가 종이를 들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판치,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이는가? 현자를 내 쫓을만큼?"

"..."

"아마 이후 백년 혹은 이백년 그이상 그와같은 천재는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전에 너같은 쓰레기가 나라를 뒤엎을지도 모르는 거지"



 국왕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는 반역에 가담한 동참자들 리스트로 오직 그와 몇몇만 가지고 있던 것이였다. 



"이리오게 한슨. 자네도 잘 알지?"



 그 반역에 동참한 한사람인 헤르데인 한슨. 귀족은 아니었지만 왕궁수비대장이였기에 그의 필수적인 포섭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포섭은 분명 성공했다. 그 역시도 야망이 있던 자였기에,



"한슨 대장은 단순한 문지기가 아닐세, 나라의 기틀을 잡는 제국기사단이지"



 제국기사단. 학문탄압 초기에 국왕의 승인하에 16~20세에 젊은이들을 모아 공식적인 탄압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각종 학문과 기술등을 배웠고 자질에 따라 국내 여러곳에 파견되어 국가의 안녕을 살피는 파수꾼이 되었다. 그들을 인솔하였던 한슨은 그 재능을 인정받아 젊은 수비대장이 되었던 것이다. 한슨 역시 야망이 있는지라 판치 후작의 제안에 참여한뒤에 끝까지 저울질 한 후 국왕에 붙는 선택하였는데 이와같은 성격을 알던 국왕 역시 인정하였던 부분이었다. (한슨의 부관인 카심은 국왕의 조카였다.) 특히 학문과 기술관련등의 자리는 공석이 대부분이어서 그러한 교육을 받은 이들이 흡수되었고 이러한 국왕의 눈을 별탈없이 요직에 넣어도 별탈이 없었다. 결국 자신이 키워준 판치 후작을 미끼로 삼아 제국의 기틀을 더욱이 굳건히 하게 되었다. 



 이후의 판치 후작은 여러 설들이 있으나 동쪽의 어느 유배지로 쫓겨났다는게 가장 유력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미술도구와 함께, 이 사건이후  유명해진 제국기사단은 여러가지 별명이 붙였는데 그중 가장 보편적인 별명은 왕의 그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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