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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조용한 머그컵에 담겨 나왔다. 평범한 인스턴트였지만 컵 때문인지 숍에서 파는 커피보다 고급스러워 보였다. 가게는 좁고 길었다. 좁은 벽에는 모두 이름 모를 CD들이 꼽혀있었고 가끔 LP나 MD도 보였다. 완전한 구시대의 상징들이었다. 좁은 가게 중간에 놓인 직사각형의 테이블에 앉아있는 난 커피를 잠깐 홀짝였다. 뜨거웠다.
“그러니까 아르바이트, 라는 거네요.”
“아, 네. 일단은.”
“일단은?”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는 내 이력서를 들여다보았다. 커피를 타는 동안 작성하라고 해서 대충 볼펜으로 끄적거린 것이다.
“이름 서철수, 나이 24세, 학교 성균관대 문헌정보학과 제학 중, 군필자, 특이사항 없음…….”
가명 작전은 통한 것 같았다. 차마 성까지 바꾸진 못했지만 철수라는 이름에 그녀는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름이 이상하네, 철수라. 옛날 이름 아닌가? 나이는 나랑 동갑이고. 서울 사시는 분이 여기까진 무슨 사정으로 오셨어요?”
이크, 생각하기가 무섭게 물어오는 그녀에게 난 약간 질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람마다 사정이 있지 않습니까. 개인적인 일입니다.”
“아, 그러세요.”
정적이 흐르고 그녀는‘흐음, 흐음.’하면서 내 이력서를 계속 훑어보고 있었다. 얼마 후 그녀는 뜬금없이“믿어도 되겠죠?”라고 물었고 나는 급하게“네.”라고 대답했다. 잠시 미심쩍은 눈을 내게 보내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녀는 내 이력서를 구겨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내일 아침 8시 까지 출근해요.”라고 말했다.
“저, 오늘은 잘 곳이 없는데요.”
“헛소리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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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의 불이 꺼지고 얼마 후 2층의 불이 켜졌다. 난 건물 밖에서 그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생전 해보지도 않았던 ‘공원 벤치에서 취침’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여행간 주인을 기다리는 프랑스 애완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길거리에서 굶어죽는 그런 개들의 심정을.
난 2층의 창문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2층 창문에서 잘 보이는 거리의 벤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한 번은 내려다보겠지. 이것은 무언의 투쟁이었다. 그리고 무언의 투쟁 시작 30분경과 후, 2층 창문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