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05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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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끝까지 가버린 이 세상에서, 남보다 이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처음엔 그냥 머리가 아팠고, 다음엔 눈앞이 하얘졌다가 되돌아오곤 했고, 그 다음엔 잠깐씩 쓰러졌다. 그래서 병원에 가 보니 그곳에선 친절히 나의 남은 수명을 가르쳐 주었다. 7개월이었다.

난 지금 홀로 벼랑 끝에 서 있다. 내가 처한 심적 상황이 그렇고, 내가 실재로 위치 해 있는 곳도 그렇다. 나는 이름 모를 산의 벼랑 위에서 밤바람을 맛보았다. 그것은 나를 떠밀듯 끌어당겼고, 그래서 나를 한참동안이나 갈등하게 했다. 그리고 바람이 사라진 잠깐 동안, 나는 모든 것을 결정했다. 과거를 찾기로.

*

지독할 만큼 없었다. 내 기억 속에서 남아 있는 추억의 편린을 찾는 것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하고 가장 보통 사람인 나에게도 추억이란 것이 존재했다. 마음이 즉 이치라고 했던가. 주자의 말을 멋대로 갖다 붙이며 난 슬쩍 웃었다. 나에게도 웃으며 떠올릴 추억이 몇 개인가 있었구나. 그저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처럼 살아 온 것이 아니구나.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부모님은 말리지 않았다. 난 부모님에게 무엇을 하던 간에 입원만은 하지 않겠다고 했고 부모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물론 정말 내가 입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쓰러져 버린다면, 그 때는 내 의지가 없을 테니 어쩔 수 없겠지. 나와 부모님은 그때까지 암묵적인 합의를 한 것이다.

반팔 남방에 청바지 차림에 작은 크로스백 하나. 내 여행 준비는 간단하며 가벼웠다. 새삼스럽게 7개월 남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죽을 날이 7개월 밖에 남지 않은 남자의 가벼움이라. 이 정도면 편하게 하늘을 날아 갈 수 있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흰색 스즈키 어드레스에 시동을 걸고 스크롤을 힘껏 당겼다.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을 여행의 시작이었다.

*

주소를 찾는데 오래 걸렸던 까닭은 이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의 그곳이 아닌, 이 나라의 수많은 투표와 민주주의를 가장한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신도시로. 나는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그녀에 대해 수없이 생각했다. 내가 처음 찾아갈 사람.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첫사랑이라는 기억의 대상자.

너무 어렸기 때문일까, 우린 필요 이상으로 담담했다. 불가항력적인 이별을 고하는 내 입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숙인 고개는 고요한 밤이었다. 내 입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은 내 입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정적이란 놈에게 집어삼켜 져 버려 그녀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아니면 이미 말조차 전해지지 않을 만큼 거리가 멀어져 있었는지도.

그 후 부터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여성을 상대하는데 상당히 민감해졌다. 지금까지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난 자신도 모르게 모든 여성에게 그녀를 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의 병이다.

Who's 날삶

죽어가느냐 살아가느냐. 그것에 따라 인생은 판이하게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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