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자네가 요즘 슬럼프라고? 나태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기가 어렵다고?

그런 날들이 하루이틀 계속되면서 이제는 스스로가 미워질만큼, 그런 독한 슬럼프에 빠져있다고?

왜, 나는 슬럼프 없을 것 같아? 이런 편지를 다 했네, 내 얘길 듣고 싶다고.



우선 하나 말해 두지, 나는 슬럼프란 말을 쓰지 않아, 대신 그냥 ‘게으름’이란 말을 쓰지. 슬럼프, 라고 표현하면 왠지 자신을 속이는 것 같아서… 지금부턴 그냥 게으름 또는 나태라고 할께.



나는 늘 그랬어. 한번도 관료제가 견고한 조직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지. 하다 못해 군대도 학교(육군제3사관학교)였다니까?

그렇게 거의 25년을 학생으로 살다가, 어느 날 다시 교수로 위치로 바꾼 것이 다라니까? 복 받은 삶이지만, 어려운 점도 있어.

나를 내치는 상사가 없는 대신, 스스로를 관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게 내 삶이었거든.

그래서 늘 힘들었어, 자기를 꾸준이 관리해야 된다는 사실이. 평생을 두고 나는 ‘자기관리’라는 화두와 싸워왔어.



사람이 기계는 아니잖아… 감정적인 동요가 있거나, 육체적인 피로가 있거나, 아니면 그냥 어쩌다 보면 좀 게을러지고 싶고, 또 그게 오래 가는 게 인지상정이잖아… 교수라는 직업이 밖에서 점검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슬럼프, 아니 나태에 훨씬 쉽게 그리고 깊게 빠져. 내가 자주 그렇다니깐? 자네들에게 표현을 안해서 그렇지.



난 나태란 관성의 문제라고 생각해. 자전거는 올라타서 첫페달 밟을 때까지가 제일 힘들지. 컴퓨터 켜기도, 자동차 시동걸기도, 사는 것도 마찬가지야. 정지상태를 깨는 첫 힘을 쏟는 모멘텀을 줄 의지가 관성이 치여버리는 현상... 난 그것이 자네가 말하는 ‘슬럼프’의 합당한 정의라고 생각해.



근데, 문제는 말야, 나태한 자신이 싫어진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 게으른 일상에 익숙해져서 그걸 즐기고 있단 말이지.

‘슬럼프’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그걸 즐기고 있단 말이지.

실은 자네도 슬럼프를, 아니 오랜만의 연속된 나태를, 지금 즐기고 있는 거라면 이 글을 여기까지만 읽어. 딱 여기까지만 읽을 사람을 위해 덕담까지 한 마디 해줄게. “슬럼프란 더 생산적인 내일을 위한 재충전의 기간이다.” 됐지? 잘 가.

         



                  
 
하지만, 위에 쓴 덕담은 거짓말이야. 너무 오래 나태하면 안돼.

자아가 부패하거든, 그러면 네 아름다운 육신과 영혼이 슬퍼지거든, 그러면 너무 아깝거든.

그러니까, ‘정말’ 슬럼프, 아니 나태에서 벗어나겠다고 스스로 각오해. 그리고 이 다음을 읽어.



보통 ‘슬럼프’ 상태에서는 정신이 확 드는 외부적 자극이 자신을 다시 바로 잡아주기를 기다리게 되거든?

어떤 강력한 사건의 발생이나, 친구/선배의 따끔한 한 마디, 혹은 폭음 후 새벽 숙취 속에서 느끼는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이라도… 그런 걸 느낄 때까지는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자학을 유보하거든? 땍! 정신 차려 이 친구야, 그런 자극은 없어, 아니면 늘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결국 자신이란 말야. 그 자극을 자극으로 받아들이고, 그걸 생활의 실천으로 옮기는 스스로의 노력이 없으면 그런 자극이 백번 있어도 아무 소용 없단 말야. 정말 나태에서 벗어날 참이면 코끝에 스치는 바람에도 삶의 의욕을 찾고, 그러지 않을 참이면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늘 같은 상태라니까?



내가 자네만할 때는 말이지, 가을이면 특히 11월이면, 감상적이 되고 우울해지고 많이 그랬거든? "자 11월이다, 감상적일 때다" 하고 자기암시를 주기도 하고… 그래 놓고는 그 감정을 해소한다고 술도 마시고, 음악을 듣고… 그러면 더 감상적이 되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은근히 즐겼어. 딱지가 막 앉은 생채기를 톡톡 건드리면 따끔따끔 아프지만 재밌잖아? 내 젊은 날의 버거움이란 그런 딱지 같은 거였나봐.



나도 철이 들었나보지? 차츰 해결법을 찾았어. 감정은 육체의 버릇이라는 걸 깨닫게 된거지.

일조량의 부족, 운동량의 부족, 술/담배의 과다… 즐기지 않는 감정적인 문제에 근원이 있다면 그런 거야. 난 정말 감정에서 자유롭고 싶으면 한 4마일 정도를 달려. 오히려 술도 되도록 적게 마시지, 몸이 아니라 마음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일을 해. 꽤 효과 있어.



더 근원적인 건 '목표'의 문제야. 나태는 목표가 흐려질 때 자주 찾아오거든. 선생님 같은 나이에 무슨 새로운 목표가 있겠니?

내 목표란 '좋은 선생' '좋은 학자' 되는 건데, 그 '좋은' 이라는게 무척 애매하거든. 목표는 원대할수록 좋지만, 너무 멀면 동인이 되기 힘들어. 그래서 나 같은 경우엔 더 작고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지. 대개 일주일이나 한달짜리 목표들…



슬럼프에서 벗어나고 싶어? '정말로' 원한다면 해결은 생각보다 쉬워. '오늘' 해결하면 되. 늘 '오늘'이 중요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뭐 이런 차원이 아니야. 그냥 오늘 자전거의 첫페달을 밟고 그걸로 만족하면 되. 그런 오늘들이 무섭게 빠른 속도로 모이거든, 나태가 관성인 것처럼 분주함도 관성이 되거든.



사실은 선생님도 먼 나라에 혼자 떨어져서 요즘 감정적으로 무척 힘들어.

그래서 물리적인 생활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해. 육체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했잖아? 늦게 자지 않고, 일찍 일어나고, 술 마시지 않고, 햇빛 아래서 많이 움직이고 걷고 뛰고, 꼭 1시간은 색스폰 연습하고, 몇 글자라도 읽고, 3페이지 이상 글쓰고… 나는 잘 알거든, 이런 육체적인 것들이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이 나태 속으로 빠지게 되는걸. 여러 번 경험했거든.






힘 내. 얘기가 길어졌지? 내가 늘 그래. 대신 긴 설교를 요약해 줄게. (선생님답지?)




. 나태를 즐기지 마. 은근히 즐기고 있다면 대신 힘들다고 말하지 마.
. 몸을 움직여. 운동하고, 사람을 만나고, 할 일을 해. 술 먹지 말고, 일찍 자.
. 그것이 무엇이든 오늘 해. 지금 하지 않는다면, 그건 네가 아직도 나태를 즐기고 있다는 증거야. 그럴거면 더 이상 칭얼대지 마.
. (마지막이야 잘 들어?) 아무리 독한 슬픔과 슬럼프 속에서라도, 여전히 너는 너야. 조금 구겨졌다고 만원이 천원 되겠어? 자학하지 마,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그거 알아? 모든 것은 흘러. 지나고 나면 이번 일도 무덤덤해 질거야. 하지만 말야, 그래도 이번 자네의 슬럼프는 좀 짧아지길 바래.


잘 자.
(아니, 아직 자지 마. 오늘 할 일이 있었잖아?)

새임.

(2005. 2.) 서울대학교 김난도 교수

Comment '18'
  • ?
    사이드이펙트 2012.04.08 01:42

    "(2005. 2.) 서울대학교 김난도 교수"

     

    이부분에서 난 생각을 멈췄다.

     

    솔직히 제가 존나 각팍한놈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저런건 진짜 다른이의 말이 아닌 자기가 피부로 느껴야 되는법.

     

    니체던 파우스트던 이드 에고 뭐시기던 자기랑 안맞으면 끝이에요.

     

    그러니 자기계발서에 나온내용도 솔직히 맨날 한말 또하고 한말 또하고니까. 그냥. 뭔갈 해요. 그게 정답인듯

  • 빠르봉뜨 2012.04.08 02:11
    #사이드이펙트

    요점은 항상 비슷하지만 사람마다 느끼는게 다르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 ?
    너에게닿기를 2012.04.08 04:17

    음악 제목 좀 알수 있을까요?

  • 빠르봉뜨 2012.04.08 04:35
    #너에게닿기를

    July - In Love 입니다

  • ?
    karas 온프 대장 2012.04.08 04:52

    난 나태한데......

  • ?
    덤벼봐임마 2012.04.08 05:56

    다시 한번 제자신을 보고 반성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

     

    고맙습니다 ^^

  • 빠르봉뜨 2012.04.08 14:53
    #덤벼봐임마

    하하^^

  • ?
    일리단 2012.04.08 12:03

    아...

  • ?
    토로 2012.04.08 13:36

    좋은 글이군요.


    정말 중요한 것은 결국 자신이란 말야. 그 자극을 자극으로 받아들이고, 그걸 생활의 실천으로 옮기는 스스로의 노력이 없으면 그런 자극이 백번 있어도 아무 소용 없단 말야.


  • ?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가슴에 와 뭔가 와닿음
  • ?
    독청독성 2012.04.08 14:02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에 보시면 다 나와있습니다 꼭보세요

    두번보세요

  • ?
    시첸 2012.04.08 15:20

    아프니까 청춘이다 책보면 됨..

    다 맞는말 같은데 참 나 자신을 바꾸기는 힘든듯 

  • ?
    38377 2012.04.08 15:22

    정말 좋은글인데 글씨체가 너무 작아서 안읽어져요

  • 사이드이펙트 2012.04.08 16:53
    #38377

    감히 통수를쳐

  • ?
    egoist 2012.04.08 16:08

    결국 무슨말을 하던 김난도 교수가 해야 좀더 널리 퍼진다는 결론

    저런말을 누가 안했겠어

  • ?
    멘토 2012.04.08 19:01

    좋은얘기다..

  • ?
    500Gold 2012.04.08 19:18

    다시 시동 걸어봅니다. 

  • ?
    시러쫌 2012.04.10 16:06

    나태함이 인생의 반 ㅋㅋㅋㅋㅋㅋ... 어뜩해 ㅠㅠ


포인트 안내 - 글 작성: 20 / 댓글 작성: 2

List of Articles
번호 카테고리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45 좋은이야기 웃기는 의사 11 빠르봉뜨 04.21 7090
44 좋은이야기 한국에서 고졸로 취직하기 14 2 빠르봉뜨 04.17 10170
43 좋은이야기 생활속 지혜 9 빠르봉뜨 04.16 6365
42 좋은이야기 소방관의 지혜 25 19 마냥놀아 04.11 10931
» 좋은이야기 지금 자신이 슬럼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18 빠르봉뜨 04.08 6551
40 좋은이야기 부모의 정의 4 title: 크로우2 (파워블로거만 구입가능)강물처럼 04.04 4746
39 좋은이야기 역시 월드스타 10 독한 04.02 6067
38 좋은이야기 마요네즈 병 이야기 3 38377 04.01 4069
37 좋은이야기 2주간 9.8킬로 감량 식단 공개... 3 푸른돌멩이 03.24 5026
36 좋은이야기 2700만년의 기다림 ( 감동 / 스압) 11 5 Wⅰzard 03.23 6660
35 좋은이야기 Rick and Dick Story 3 karas 03.20 3683
34 좋은이야기 게임을 해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16 사랑은로딩중 03.19 8246
33 좋은이야기 그돈 모아서 뭐하려고? "중학교 갈때 교복 살려구요"| 15 2 title: 매니저 아이콘Suzy 03.19 5248
32 좋은이야기 파락호 5 아영 03.16 4641
31 좋은이야기 26세 청년백수 3 kochan 03.15 4718
30 좋은이야기 버킷리스트... 1 뤼펜 03.11 3422
29 좋은이야기 그래도 아직은 살만한 세상입니다 3 독한 02.27 3534
28 좋은이야기 사랑에 관한 33가지 1 리차드 02.27 3478
27 좋은이야기 가끔은 쉬어가도 괜찮아요 5 하이브리드 02.25 3677
26 좋은이야기 흔하지 않은 부부 3 2 뒷집그놈 02.17 4017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Nex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