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3년 전, 하이텔과 나우누리 등의 PC통신 게임게시판에 한 게임 개발자의 한 맺힌 글이 올라 왔습니다. 와레즈로 인한 불법복제 등으로 인해 한국 패키지 시장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서 패키지 게임 개발을 접고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적응해 온라인 게임 개발로 갈 수 밖에 없는 처지를 내용으로 했던 글. 당시 그 게시물은 한국에서 게임을 개발하는 개발자의 절규와 같았고, 전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도 하나의 글귀는 시간이 지나도 결코 잊혀지지 않습니다.
“국산 게임이 살 가치가 없다면 사지 않아도 좋으나, 만약 그렇다면 하지도 말라. 제작자들이 노력한 만큼의 댓가를 받았으면 한다. 언젠가 꺼질 수밖에 없더라도 제발 마지막 불씨는 꺼뜨리지 말아 달라”
요즘 어린 세대는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모뎀을 사용해
전화선과 연결하여 PC통신 등의 인터넷을 사용했습니다
해당 글을 올린이는 당시 플레너스 엔터테인먼트 게임 산업본부 손노리의 이원술 본부장. 현 로이게임즈 대표입니다. 이원술 대표는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를 비롯해 <포가튼 사가>, <강철제국>, <악튜러스>, <화이트 데이> 등 올드 유저들에게 있어서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명작들을 다수 배출한 개발자입니다. 패키지 시장의 몰락과 함께 온라인 게임이 부흥하면서 1세대 개발자였던 많은 이들은 패키지에서 온라인으로 방향을 선회하는가 하면, 게임계를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손노리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켜주었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이원술 대표는 2001년 로커스 홀딩스로의 피합병, 제작 팀의 분사, 자체 개발작들의 참패, 투자사들의 투자 철회 등 갖은 역경을 거치면서 점점 유저들에게 잊혀져갔고 2012년 CJ E&M 넷마블 소속 턴온게임즈에서 <다함께 차차차>를 만들어 히트시키지만, 표절 논란으로 기존 팬들에게도 적지 않은 질타를 받았습니다. 이후 로이비쥬얼의 자회사 로이게임즈로 옮겨 현재 <화이트데이: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의 모바일 게임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1세대 개발자로써 한국 게임사에 여러 족적을 남긴 로이게임즈 이원술 대표
앞서 2002년 이원술 대표가 <마지막 불씨는 남겨 두고 싶습니다>는 제목으로 장문의 글을 올리게 된 시초는 2001년 출시한 <화이트데이>의 불법복제 파동 때문이었습니다. 출시와 함께 와레즈에 불법이미지가 돌아다니면서 개발자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고, 판매량보다 더 많은 패치 다운로드 횟수를 기록한 일화는 사실여하를 막론하고 유명한 일입니다.
당시 손노리는 불법복제를 근절하기 위해 과감하게 배포자들을 고발하기에 이르지만, 대상자들이 미성년자라는 점에서 오히려 손노리의 행동이 심했다며 질책을 하는 이들도 있었고, 불법복제를 옹호하는 부류들은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저작권의 의의 자체가 희박했고, 정품을 구매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었던 웃긴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패키지 버전의 <화이트데이>가 발매된지 14년이 지난 후 모바일 버전의 <화이트데이: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이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패키지로 발매된 <화이트데이>의 리메이크작으로써, 현재 많은 패키지 게임의 IP들이 모바일화 되고는 있지만 <화이트데이>는 국내 게임계의 암흑기를 거치고 다양한 우여곡절이 많은 작품이라 그 기대와 관심이 남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14년부터 리메이크에 대한 소식이 루머로 뜨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시대가 지나 고전 패키지 게임을 지금에 와서 플레이 해보면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그래픽이나 사운드 문제로 10분 이상도 플레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화이트데이>는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내 3D 호러 게임의 지평을 열었던 작품입니다.
국내에서는 불모지라 할 수 있는 어드벤처 장르에 호러를 결합. 게다가 우리에게 친숙한 존재인 학교를 소재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높은 몰입도를 자랑했습니다. 또한,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이 만든 ‘미궁’은 사운드만으로도 엄청난 공포감을 선사했으며, 자체 제작한 왕리얼 엔진은 당시 3D 게임의 숫자가 많이 않음에도 국산 3D 게임의 자존심을 세워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만큼 시간이 지나도 고전 게임의 티가 적고, 리메이크를 해도 원작과 이질감이 적다는 점에서 화이트데이는 모바일 버전에 최적화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이트데이: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 CG 트레일러
특히, 모바일로 돌아올 <화이트데이>의 소식에 기뻐하는 유저들은 천 개의 한정판을 불과 4시간 만에 매진시켰습니다. 8만 8천 원이라는 적지 않은 가격에 모바일 게임에서는 드물게도 한정판 판매라는 마케팅을 실시했는데, 아직도 많은 <화이트데이>(라고 쓰고 손노리팬)의 마니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겠죠. 게다가 최근 모바일 게임에서는 인앱결제를 바탕으로 하는 부분유료화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반면, <화이트데이: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은 8,800원의 유료 게임으로 판매됩니다. 국내 모바일 게임 중에서 유료 게임을 보기는 상당히 드물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만큼 게임성에 자신이 있다는 것이겠죠.
고급 백팩과 우산, 아트북 등이 들어있는 한정판
게다가 <화이트데이>는 PS4 VR로의 발매도 공식 선언했습니다. 모니터나 태블릿 등의 액정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공포감보다는 확실히 VR을 통해 피부로 느끼는 공포감이 훨씬 강하기에 어쩌면 <화이트데이>에 가장 적합한 플랫폼이 아닐까도 예상됩니다. 여기에 기존에 있던 연애 시뮬레이션 요소도 강화하여 여학생들과의 다양한 이벤트를 더해 공포감을 동반한 다양한 감정 전달도 기대되는 부분입니다.
화이트데이 VR 공식 영상
이원술 대표의 마지막 불씨는 그가 염원했듯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과거 그에게 흥분과 분노를 안겨줬던 타이틀을 14년 만에 다시 들고 왔고, 불법복제로 멍든 패키지 시장은 조금이나마 개선됐습니다. 물론, 아직 유저들의 마인드가 투명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과거처럼 저작권의 의미가 불분명하거나 불법복제를 무조건 옹호하는 이들도 적어 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이원술 대표의 마지막 불씨가 ‘활활’ 지펴질지 기대해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