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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가로등 아래는 쓰레기도 가득 차 있다. 밤의 바람이 차가워진다. 아무래도 오늘은 코트 하나만으로 버틸 수 없는 일기인 것 같다. 천천히 골목길을 돌아서자 사람과 빛으로 가득찬 도회지가 전자음과 함께 눈 앞에 나타났다. 횡하니 지나가는 승용차들에게 지레 겁을 먹기도 하며.

 

유독 빛이 났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가게들의 간판들과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지금 내 옆에 늘어선 수많은 간판들은 '메리 크리스마스'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얼굴엔 만연히 꽃을 피우고 이곳저곳에선 크리스마스 케익을 파느라 바쁘다. 이러한 풍경에,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춥게 느껴졌으나 지금은 되려 따뜻하다.

내 옆으로 작은 아이와 부모가 지나갔다. 무슨 선물을 받고 싶냐고 물어보는 부모의 질문에, 아이는 천연스럽게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는다. 비밀이라는 것이다. 아이의 어머니는, 천사의 웃음을 바라보며 지그시 미소 짓는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돌연 외로운 심사를 느끼게 되었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웃음소리는 곧 사그러들었다. 아깐 밤이라곤 도시 생각할 수 없던 풍경도 일말의 빛만 남겨두고 바람과 함께 흘러가버렸다. 골목길로 들어서자, 아까의 빛도 말끔히 지워져버렸다. 이젠 집으로의 귀가길을 기억하는 두 다리만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외롭고 쓸쓸한 밤엔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어떻게든 집에 들어왔으나 밖과의 차이가 없었다. 바닥은 얼음처럼 차갑고 깨진 유리창에는 돌풍보다 더 거센 바람이 들어섰다.

굶주린 창자는 비비 꼬며 밥 달라고 성을 낸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으로 배를 채우리. 막막하기만 할 뿐, 나는 그저 빨리 잠자는 것이 속책이다 라고 생각하며 이불도 깔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차갑다. 뼈까지 얼어버린 것 같다. 손에는 감각조차 마비되고 시린 눈은 뜰 수도 없다. 이 추운 겨울날을, 코트 하나만으로 버틸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코트 하나만이라도, 감지덕지 여겨야할 시기.

 

선하품만 할 뿐, 잠은 오지 않는다. 나는 지친 몸을 이끌어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무엇이라도 있으면, 당장 팔아치워 먹을 것을 사서 배를 채우려는 생각으로.

그러나 서랍 속엔, 나의 꿈만이 덩그라니 놓여져있었다. 그것은 학생 때부터 줄곧 써오던 것들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이것들에게서 향수를 느꼈으나 곧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꿈에 대한 동경은, 어느새 현실에서의 목표로 변하였다. 그것을 느끼자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여느때보다 보람찬 하루를 만끽했다. 꿈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아아, 이렇게 멋진 세상을, 나는 아무런 욕심없이 살아가겠다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굶주린 배는 나의 이성을 먹어치우고 본능만을 남겨두었다. 살기 위해서, 세상을 살아갔다. 꿈은 어느새 잡동사니처럼 버려졌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실패하였다. 지금의 난 산송장과도 같았다.

이러한 생각을하자 덜컥 화가 나버려 여태까지 쌓아둔 내 꿈들을 전부 집어던졌다. 벽에 휑뎅그레 놓여진 종이들이 찰싹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봉투 하나가 세어나왔다.

 

이 봉투가 무엇인가 하여 뜯어보았다. 놀랍게도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다. 하지만 발신인을 보니 2년이나 더 된 것이었다.

아마도 나중에 읽는답시고 서랍 속에 넣어둔 모양이었다. 그대로 펴서 읽어보았다.

 

내용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언제나 하시던 말씀들을 적어서 보내신 것들.

하지만, 편지를 읽은 나에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이 슬픔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못난 자식놈을, 작은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믿고 있는 부모님에게, 너무나 죄송해서, 언제나 걱정만 하시는 분들에게,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내밀어서,그리고 꿈을 포기해서.

뚝뚝 흘리는 눈물은 뺨을 타고 온몸을 적시었다. 낡아빠진 아날로그 시계는 정확히 12시를 가리켰다.

나는 힘차게 일어나 가슴 속으로 외친다.

'메리 크리스마스.'

나는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꿈을 이뤄 고향으로 올라가 웃는 모습으로 부모님을 만날 것이다.

쓸쓸하고 차갑기만 하던 작은 골방에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찬 내가 서 있다.
 
 

Who's 베르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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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마 - CrashOTL
BMS - OTL , 소속 - CrashCrew
카몬히어로 - 설국

국경의 긴 터널을 넘자, 곧 눈의 고장이였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본문 中
Comment '1'
  • ?
    Kis세자르 2009.09.01 01:12
    신춘문예에 내려고 쓰신건가봐요 ? 잘읽고갑니다 =_=;ㅋ

포인트 안내 - 글 작성: x / 댓글 작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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